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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

장자(莊子)를 마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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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입춘이었다. 소한 대한  다음에 넘기는 마지막 추위였기에 약간의 추위를 예상은 하였지만 날씨가 매서로웠다.. 서서히 기지개를 펴던 목련 봉우리도 움찔했고,  겨우내 보듬어 오던 다육이도 몇 포기 더 늘어나서 마지막 추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하우스를 여며주고 덮어 주었다.

곁에 두고 읽던 장자(莊子) 펼첬다. 올 겨울에 한번 더 읽어 보겠노라고 계획했던 초심이 흔들려   아직까지도 소요유를 읽고 있으니 나의 게으름 탓 이다. 내가 즐겨 읽는 장자의 내편은 호방함과 허품스런 과장 속에서도 알려주는 진실의 매운맛에 매료되어 애독하는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동양사상과 서양 사상의 우위를 비교하는  즉면이 있지만 나는 동양사상을 옹호하는 편이다. 장자 내편을 읽노라면 채근담에서 느꼈던 향기가 똑 쏘는 산나물 씹는 맛 과는 달리 시원한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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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다보면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양산박 산채에서 두령들과 호연 기기를 나누는 송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선들은 신선로에서 대추차를 즐겨 끓여 먹었다는데 커피 포트에 대추만을 넣고 차로 만들어 먹어 보아야겠다.

나는 가끔 당진 정미면 수당리의 안국사지에 가본다  마치  신선들이 사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 도는 이곳의 공식 명칭은정 옛날 안국사란 절이 있었던 터인 안국사지이다.  일반사찰처럼  일주문이나 석탑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잘 다듬이진 입구부터 우선 깨끗하고 정갈하다. 길 옆엔  쥐똥나무 생울타리가 잘 다듬어져 있고 연못의 청정함과 장독대, 그리고 초막은 조용했다. 소나무 아래엔 교자상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돌이 있어서 한여름 낮잠자가에 안성맟줌 이다.  제갈공명이 출사 하기 이전 은거하였던 집이 이런 분위기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이곳이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아 보였고, 어쩌면 이곳은 한국의 장자교(壯子敎)의 모태 인지도 무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의 천국인 한국에서 왜 장자교(壯子敎)가 탄생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았다. 누구나 한 번쯤 장자에 매혹되었고, 젊은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마력을 사람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날려 버리지 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심심 파적으로 종교단체로 장자교(壯子敎)가 있는지 인터넷 이서  찾아 보았더니 고군산군도의 선유도와 장자도를 잇는 다리 장자교 (壯子橋)는 있지만 종교로서의 장자교(壯子敎) 없었다.

혜자는 장자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앞에 엄청나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저>라고 불렀다네. 그 굵은 줄기는 혹 투성이 로 먹줄을 칠 도리가 없었고, 그 작은 나뭇가지는 꾸불꾸불한 것이 자도 쓸모없다네.  그러므로 이 나무를 집앞에 세워 두어 목수조차 거들떠보지 않는다네. 그런데 당신의 주장은 이 <저> 나무와 같이  그 크기만 클 뿐 쓸모없는 물건 같으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일세」
그러자 장자는 대답했다.
「선생은 살쾡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오? 이놈은 땅에 몸을 낮게 엎드려 먹이를 엿보고 있지. 막상 먹이가 나타나면 가로뛰고 세로 뛰면서 주위의  높낮이는 안중에도 없지. 그러다가 결국은 덫에 걸려든가 그물에 뛰어들어 죽는 게 고작이지. 이와 반대인  들소는 확실한 대물이니 덫이나 그물에 걸릴 염려는 없지만 쥐를 잡을 만큼 재빠르지도 못 하지. 이렇듯 어떤 것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는 법인데, 선생 께서는 모처럼 큰 나무를 가졌으면서도 그걸 쓸모없다고 걱정하고 계신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 옆을 거닐면서 나무 그늘에서 유유히   낮잠을 자면 어덯겠소? 
이 거대한 <저 >나무처럼  도끼로 찍히어 목숨을 잃을 걱정도 없으니 그것이 쓸모 없도라도 조금도 난감 할 일은 없을 것 이요,」


내가 알았던 형은 덩치가 무척이나 커서 골릴라 같았었다. 그런데 왜소하고 덩치 작은 나와 씨름하면 번번이 넘에 졌다. 그 형은 힘은 장사였지만  날렵 히지 못에서 내가 안다리를 걸고 살 쨕 밀어도 통나무 쓰러지듯이 꽝 하고 넘어젔다.  나는 생각했다. 그가 지모라도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못살게 굴였을 것이며, 조물주의 지극한 배려로  세상을 공평하게 만든 것 아라고.

임꺽정의 모사 서림도 홰소했으며, 칠삭 동리 한명회도 우람한 체구는 아니었다, 번번이 통나무처럼 넘어지던 그 형도 저 세상으로 갔지만 고리라 처럼 씩씩 거리며 덤비던 모습이 아련히 가물 거린다. 맑은 눈은 한없이 선량했고 남을 괴롭히는 일 때 위는 전혀 없었던 그는 서당을 아무리 다녀도 천자문 첯장도 알지 못해 훈장도 지쳐서 더는 나오지 말라고 퇴출시켰다. 그런데 그는 말끝마다 "원형 이정(元亨利貞) 을  입에 달고 다녔다. 물론 뜻도 모르고 하는 말 이이며 주워들은 말이다.

나는 장자를 읽다 가끔 추억의 그 형이 생각난다. 우직하면서도 한 없이 선량하고 안다리 걸면 쿵 하고 넘어지지만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는 그 형은 온갖 권모술수로 세상의 어지럽히는 악당 틈에서 홀연히 핀 상사화 같고, 매화 같으며, 목련과 같았다, 내가 생각했던 신선이 사는 안국사지의 연못가에서 그가 동자와 함께  홀연하 나타나 것 같다. 어쩌면 장지도 그 옆에서 웃고 있을 것 같다.

늪에 사는 보잘것없는 꿩어은                                                                                                                    곡식 한일 주워 먹으려면 열 번은 뛰어야 하고                                                                                             물 한 모금 마시려면 백번을 뛰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원하는 모든 것이 눈앞이 있다 해도                                                                                            꿩은 닭장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차라리 훨훨 자유로이 날라 스스로 양식을 구하려 한다                                                                                               양생주 에서                                                                                             

이것이 장자의 정신세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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