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의 작가 조명희 문학관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뜨겁게 살다 간 한 여인의 삶을 보고 숙연했으며, 이련 마음은 오래도록 여운이 되어 메아리처럼 나의 심금을 흔들었지요.
불꽃처럼 살다 간 젊은 여 교수, 그녀의 이름은 위지안, 그는 죽기 전까지 블로그에 글을 올렸으며, 그녀가 남길 글 들이
모여 "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으며 책 표지 뒷장에 그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인생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에서 유학, 환경과 경제학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를 가지고 귀국해 중국 학계에 주목을 받으며 서른이 안된 나이에 푸단대학교 강단에 섰다. 북유럽의 바아오 메스 에너지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물론 노르웨이에 거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해 성사 단계에 있었다.
그녀는 돌이 막 지난 아들을 보며 행복해 했고, 외동딸인 그녀를 '세계 100대 명문대' 교수로 만든 부모는 자랑스러운 행복에 젖어 있을 그 순간, 그녀는 말기암 선고를 받았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는 늘 안타가운 사연이 있게 마련 이지만, 이 사연이 알려진 후 이름을 딴 위지안 학원, 위지안 카페, 위지안 고시원 등이 생겨 난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반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은 그녀에게 이 세상에서 70년동안 해야 할 일을 불꽃같이 살면서 30년에 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녀의 불꽃같은 삶은 뒷전으로 하고 "미모의 여교수"로 호기심을 부추기는 면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불꽃 같은 삶을 다시 한번 조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뜨겁게 살다 요절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 늘 안타갑고, 좀 더 살았더라면 더 큰 업적을 세상에 남겼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녀의 오슬로대학 유학시절에 어려웠던 이야기, 힘들어하면서도 이를 극복했던 이야기 들은 기백이 없이 안주하려고 하는 우리 주변의 젊은이 들 에게 경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표대로 실행해 나가는데 미숙한 나와 주변 사람들은 무엇이 그녀를 불꽃같이 살게 하였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벽 2시까지 잠 안 자고 학습했던 그녀의 집중하는 성격과 일류 요리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중국 특유의 미식(곰발바닥, 공작새 혀, 원숭이 골, 전갈, 뱀, 등 세상 오만가지}을 탐닉했던 그녀에게 병마는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이룩하고야 말겠다는 성취동기와 굳은 의지력은 오래도록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에는 충분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 만으로도 그녀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습니다.
힘든 일은 회피하려고 하고, 이상도 야망도 없이 어딘가에 의지하고 안주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언제 싹텄는지 답답한 생각마저 듭니다. 우리 주위의 젊은이 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경력 단절된 딸에게 수제 화장품 제조 창업을 권고했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권고가 무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종건까지 수제비누가 공산품으로 분류되어서 마음만 먹으면 솜씨를 뽐낼 수 았었으나 이젠 화장품으로 분류되어 화장품법의 제재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제 화장품 창업을 하려면 수제 화장품 제조 자격증이 있어야 하며, 자격시험을 보려면 공학 학사 이어야 한답니다.
제조설비 시설도 까다로우니 웬만한 결심 가자고는 언감생심 도전하기가 힘들지요.
규제 천국인 대한민국에서의 또 다른 문턱을 딸에게 도전해보라고 권고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이라고 또 한 번 지탄을 받았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위지안 교수도 투덜 댈 것 같았습니다.
위지안 교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