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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오페르트가 도굴한 남연군묘는 지금 발굴중 권좌에 오른 대원군은 주마등 같은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그의 특기인 난초를 치고 있었다. 안동 김 씨 삭망의 개까지 되면서도, 천하명당인 가야산 아래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 자식이 임금이 된다는 믿음 때문에 버티어 온 보람이 있어 이제는 대원군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경복궁도 마무리 짓고 비변사도 폐지하고, 이제부터 할 일이 첩첩산중이지만 천주교도 들만 조용하면 세상은 태평 성대 일 텐데, 천주교가 문제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때 급보 들어왔다 내용은 "남연군의 묘가 서양인에 의해 도굴" 되었다는 내용 이었으며, 천하가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는 대원군은 부들부들 떨며, 노기가 충전하여 길 기리 날뛰고, 불 호령이니 주위가 얼음장으로 살기마저 느껴졌다. 1868년 상해에서 오페르트는 페롱 신부와 안내.. 더보기
신리성지의 추억 문짝이 와장창 부서지고, 관졸들이 육모 방망이를 휘두르며 봉두난발한 사내를 댓돌 위에 내 동댕강이 치니, 머리 얼굴에서 선혈이 낭자한 사내는 마당에 폭 고끄러 지며, 관졸은 사내를 무참히 때리고 또 때리더니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갔다. 이 집은 손자선(세례명 토마스)의 집이었으며, 기거하던 다불뤼 주교를 찾던 관졸들은 광분하여 보이는 사람이며 마구 체포하였다. 다불뤼 주교는 거더리 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니 이곳이 신리 공소였다. 이렇게 무섭고 험악했던 장소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스럽게 놀고 있었다. 내가 처음 신리에 간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신촌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을 따라 신리공소의 옆 단칸방에서 생활을 했을때 였었다. 짚누리가 산처럼 높았었고, 싸락눈이 내릴 때까지 벼를 타작 했던 것을 .. 더보기
합덕을 부흥시킬 마지막 자존심 합덕성당 어릴적 합덕성당에 대한 기억은 천주교 신자인 친구를 따라 합덕 성당엘 갔다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외국인 신부를 본후 공포에 질려 성당 근처를 얼씬도 않 했던 일이 있었다. 작달막하고 약간 뚱보안 서양 신부 는 눈이 파랗고 수염은 양 옆으로 꼬아 올렸으며 그때 본 사제복은 피에로 같았던 것 같다. 촌부만 보아왔던 어린 나는 무서움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 아마 조선 말기에 서양인을 양이라고 하며 도깨비 처럼 신기하게 보였던 민중의 시각 그대로였던 것 같았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신촌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시던 부친께서는 눈오는 어느날 내 손을 잡고 20리도 넘는 합덕장엘 가서 중국집의 찐빵을 사 주셨다. 중국말을 하는 중국집 주인도 신기했지만 오가면서 본 거대한 산같이 크게만 보였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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