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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문학

오페르트가 도굴한 남연군묘는 지금 발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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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좌에 오른 대원군은 주마등 같은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그의 특기인 난초를 치고 있었다. 안동 김 씨 삭망의 개까지 되면서도, 천하명당인 가야산 아래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 자식이 임금이 된다는 믿음 때문에 버티어 온 보람이 있어 이제는 대원군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있다. 경복궁도 마무리 짓고 비변사도 폐지하고, 이제부터 할 일이 첩첩산중이지만  천주교도 들만 조용하면 세상은 태평 성대 일 텐데, 천주교가 문제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때 급보 들어왔다 내용은 "남연군의 묘가 서양인에 의해 도굴" 되었다는 내용 이었으며, 천하가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는 대원군은 부들부들 떨며, 노기가 충전하여 길 기리 날뛰고, 불 호령이니 주위가 얼음장으로 살기마저 느껴졌다.

 

 

1868년 상해에서  오페르트는  페롱 신부와 안내자인 조선의 천주교 신도, 선원으로는 말레이인, 청국인 등, 100여 명과 함께 차이나타운 호에 승선 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 통상을 해서 돈벌이를 할려는 목적이 있었고, 페롱신부는 천주교를 박해 하는 대원군을 혼내 주려는 목적 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에서 시신과 부장품을 훔처 대원군과 흥정 하려는 같은 목표를 두고 출항했던 것이다. 

아산만을 거슬러 올라온 차이나타운호를 행담도 앞바다에 정박한 후 이들은 작은 배로 갈아타고 만조를 기다려 서서히 삽교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은 제방을 막아 담수호가 되었지만 그때는 만조시 구만리까지 배가 올라갈 수 있었으니, 그들은 구만리에서 상륙 후 곧바로 덕산 관아를 기습해 무기와 도굴 장비를 탈취한 뒤 덕산 군수 이종신 등을 앞세워 남연군 묘로 갔었다.

어둠이 시작 되고 도굴은 시작 되었으나 장비라곤 삽 5자루가 전부 였으며, 덕산 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파고 또 팟지만 석곽은 백회로 두껍게 덮였기에 기어이  뚫지 못하였으며, 먼동이 트면서 갯물이 빠질때가 가까위 오고, 주민들이 몰려오니 이들은 서둘러 구만리로 퇴각 하였다 

 

통상과 선교를 내세워 권력자를 압박하기 위해 그의 묘를 파 헤친 그들의 만행은 만국의 지탄을 받았으며, 그렇지 않아도 서양인을 양이(洋夷)라고 부르던 대원군에게 천주교 대한 더 큰 박해는 물론 쇄국정책의 강화하는 빌미 주었다.      천주교 신도들을 구덩이을 파서 생매장 하였으며, 우물에 김장 담듯이 차곡차곡 쌓아 넣어 죽였으며, 머리채를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아 말려 죽였으며 그 수법은 장말로 처참했으니, 그때의 모습을 지금은 해미읍성에서 사료로 볼 수있다. 바로 병인박해의 악몽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원군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더 쇄국을 하였으니 그때부터 나라에 암운이 깃들기 시작 했던 것이다.

페롱 신부는 프랑스 인으로 전부터 내포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명망 있는 사제로서 병인박해 때 살아 탈출하여 수많은 신도를 살육한 대원군에게 보복하려고 온 것이며, 지금도 교회사에는  그의 선교에 대한 자취가 남아있다.

결국 페롱 신부는  도굴사건으로  더 많은 사람을 또 참혹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단초를 주었으며, 이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없다. 대원군을 광분케 하였으며 쇄국의 문을 더욱더 강고하게 했다는 평가도 함께 있어야 할 것이며, 이는 천주교 내부에서 논의되어야 할 담론이다. 그 후 페롱 신부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며,  남인도의 퐁디셰리 지방으로 전출되었다고 한다

 

 

이하응(대원군의 본명) 이 멀쩡한 암자에 불을 지르고 풍수지리만 믿고 부친의 묘를 이장한 그곳 , 오페르트가 세상의 비난을 받아가며 무모한 도굴을 했던 그곳,  그 묘지에는 어떤 부장품들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조선말, 대한제국의 격동기에 우리가 몰랐던 사료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문화재청 당국에서 발굴작업 진행 중이니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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