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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문학

러브 스토리의 산실 필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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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항에서 자동차를 가득 실은 화물선이 뱃고동을 울리고, 필경사 바로 뒤편  부곡공단의 제철소 굴뚝에서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컨테이너 트럭이 연방 드나든다. 이곳이 청석골과 한곡리를 오가며 청춘을 불태우던 상록수의 무대이다.  소설 속의 한곡리는 한진포구와 부곡리를 합처지은 가상의 마을이다.  

 동혁이 영신을 기다렸던 한진포구는 실제로 70년대 초반까지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드나들었고, 80년대 초까지 경기도 평택을 오가는 배가 운행했었으며, 지금은 거대한 제철소의 울타리 안이 되었다. 

 

 

심훈의 본명은 심대섭이었으며, 청송 심씨인 그는 경기도 과천군(현재 서울 흑석동)에서 태어 났다.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재학 중 학생시위 사건으로 수감되었으며 어머니께 드리는 옥중편지가 심훈의  남긴 최초의 육필 서신이었다. 

 심훈은 문학적, 사상적 기틀은 3.1 운동과 중국 지강대학교 유학 시절에 이루어졌던 것같다. 

 건너편에는 반 지하의 전시실이 있다. 

심훈은 작가이었으며 신문기자 였으며, 시인 이었으며, 영화감독 이었으니 만능엔터테이먼트 였다하지만 그는 시대적 환경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오래 할 수 없었다. 1935년 동아일보의 장편소설 공모에서 상록수로  등용하게 되었음은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일제 하에서 젊은이들의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농촌계몽 운동이었을 것이며, 최용신(작품 속에서채영신)은 당시 청석골(지금의 안산)에서 주목을 받는 농촌계몽의 화신이었으니,  지금도 안산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심훈은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조카인 심재영과 최용신을 무대에 올려놓고 상록수란 소설을 만든 것이다. 작가는 언어의 마술사이며 상황을 무소불위한 마력으로 이끌어 간다.  

 

 심훈도 그렇고 최용신도 그렇고 모두가 20대에 삶의 최고봉을 이루었고 또 요절했다. 지금의 20대는 어린애인데 그들의 빠른 각성이 놀랍다.  장수사회가 모두를 어릿광대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필경사는 심훈의 집필실이며, 그가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남향의 일자집 이며 내부는 직접 들어가 볼 수 없었으나 창밖에서 본 구조로는 심훈의 섬세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필경사 바로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심훈은 상록수의 빅히트로 확실한 작가의 반열에 등극하였고, 상금의 일부로 상록 학원도 설립하였다. 소설 상록수의 여세로 영화 상록수를 제작하려다 일제의 방해로 좌절 되고 말았다.  그 후 최은희, 김수연 등 여주인공을 등장시킨 영화들이 만들어졌으며, 최용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었기에 공전의 히트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심훈은 나운규와 함께 한국영화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자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심훈의 이 세상과 작별한 나이인 36세이었으며 일본강점기의 최고조를 다달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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