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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문학

합덕을 부흥시킬 마지막 자존심 합덕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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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합덕성당에 대한 기억은 천주교 신자인 친구를 따라 합덕 성당엘 갔다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외국인 신부를 본후 공포에 질려 성당 근처를 얼씬도 않 했던 일이 있었다. 작달막하고 약간 뚱보안 서양 신부 는 눈이 파랗고 수염은 양으로 꼬아 올렸으며 그때 본 사제복은 피에로 같았던 것 같다.

촌부만 보아왔던 어린 나는 무서움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 아마 조선 말기에 서양인을 양이라고 하며 도깨비 처럼 신기하게 보였던 민중의 시각 그대로였던 것 같았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신촌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시던 부친께서는 눈오는 어느날 내 손을 잡고 20리도 넘는 합덕장엘 가서 중국집의 찐빵을 사 주셨다. 중국말을 하는 중국집 주인도 신기했지만 오가면서 본 거대한 산같이 크게만 보였던 양관이라고 불리던 길가의 합덕성당의 위용이 놀라웠다. 

부친은 합덕성당에 대해선 한 말씀 안 하시고 합덕방죽의 연꽃 이야기, 용이 사는 이야기, 님씨 성을 기진 이들이 많이 사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부친께서는 신리공소 옆에 사셨는데 무슨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지금도 알수없는 일 이다. 

 

 

합덕성당은 1890년 고덕에 양촌성당이란 이름으로 설립 하였으며 1899년 귀틀리에 신부가 합덕성당이란 이름으로 현 장소에 이전 하였고, 패랭신부가 1929년 현 건물을  신축하였으니  벌써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종탑은 쌍으로 되어 있으며 성당의 본체는 붉은 벽돌이고 아취로 된 출입문 3개와 창은 화색 벽돌로 쌓은 고딕 형식의 건축물이었으며, 사람들은 이를 양관 아라고 불렀었다. 

 

 

1988년 충남 기념물 145호로 지정받은 건축물이며 내포지방 에서는 공세리 성당과 함께 합덕성당이 유서가 깊어  솔뫼성지, 신리성지와 함께 천주교의 중심축을 이룬다. 

힙덕성당 위로는 성동 성이 있고, 아래로는 구만리들이 끝이 안 보인다, 지금은 당진시에서 만든 농경문화 테마공원과 수리박물관이 있고 저수지터에는 연꽃이 잘 가꾸어져 있어서 함께 관람하면 아주 좋은 볼거리가 된다.    2023년애 완공하는 수도권 전찰역이 바로 인근인 옥금리에 선다니 서울의 많은 인원이 다녀 갈것 이다.

 

서해대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당진에서 신평경유 합덕 신례원을 거처 서울로 갔었으니 그때는 정말 많은 차 들이 합덕성당 앞길을 메웠는데 지금은 간간히 차가 지나갈뿐 한산 하다, 성당앞의 미꾸리지 양식장도 논에 제초제를 뿌려대는 바람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매달 1일과 11일은 버그내장 아라고 불리는 합덕 5일장이다. 면천 나무고개애서 장작을 지고 나온 사람, 순성에서 솔방울을 가지고 온 사람, 신평에서 고추포대를 지고 온 사람, 우강들의 논농사 많이 짖는 농부가 물쓰듯 뿌려대는 돈다발, 국밥집 주모, 방석집 아가씨, 송아지 거간꾼, 인근의 왈패까지 어울어진 정말 큰 장 이었다. 고덕의 한내장도이 컸지만 합덕장은 인근 각처에서 모여드는 큰 장으로 없는 것이 없었던 시절이 었다. 하지만 요즘은 장날인데도 좌판을 덮고 장삿꾼이 오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다 

 

합덕의 쇠락은 세상이 변해서 이다. 소들 강문의 곡창이 이곳의 경제를 받치고 있었는데 쌀은 이미 재화의 수단이 아니다.  쌀이 현금처럼 유통되던 때가 있었다.다. 정미소 주인이 은행의 수표 처럼 보관증을 발행했고, 이것이 현금처럼 유통 되던 때가 있었으니 이때가 합덕의 전성기였다. 

호재라고는 수도권 전철역이 합덕에 생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신실한 교인들이 합덕 성당을 받치고 있고, 이들이 한국 전주교의 중추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도시설계의 방향을 베들레헴같이 신앙의 도시로 키우 눈 것은 어떨까 생각 해 보았다.

물론 결정은 합덕 주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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