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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문학

혼불처럼 살다가 홀연히 하느님 곁에 가신 사제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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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의 모래가 막난이의 칼춤으로 피물을 들일 때 25세의 젊은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을 믿은 것도 죄냐" 

고 외척을 것이다. 머리는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매달리고 시신이 미리내에 묻힐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했노라고" 

고백하였을 것이다.  

  

 

  

오늘은 혼불처럼 살다가 홀연히 하느님 곁에 가신 사제 김대건 신부를 만나러 솔뫼성지에 갔다,

솔뫼성지는 소들 강문 끝자락의 구릉지에 위치해 있다. 소들 강문은 강문리의 넓디넓은 논에 모내기철 써레질하는 소들이 끝었이 어이 진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김대건 신부의 조상들도 소들 강문 어딘가 에서 논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가 조선에서 태동하는 시기인 1821년에 솔뫼에서 출생하였으니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사옥(1832년) 사이의 동장군보다 더 엄혹한 시기에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집안이 어떤 경로로 천주교와 인연이 닿았는지는 모르지만 조부, 부친과 숙부들이 천주교를 신봉하였고 김대건도 한양에서 기초적인 신학 수업을 하였으며,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솔뫼는 소나무가 있는 언덕 이란 순수한 우리말이다.  생가 뒤편 동쪽으로 보이는 소나무는 이름에 걸맞게 깨끗하고 기품 있으며 거룩해 보였다. 나무 중의 으뜸인 소나무는 안면도 휴양림의  소나무로 알았는데 이곳 솔뫼 소나무는 안면송처럼 멀대같이 크지도 않고 쩍 벌어진 가지마다 기품이 있어 보인다.  

 

   

더위도 한풀 꺾기어 아침저녁은 제법 서늘하기까지 하다. 2021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되었고, 탄생 200주년을 맞아하는 김대건 신부를 추모하는 행사가 솔뫼성지에서 열리고 있다. 솔뫼는 내가 사는 인근 지역에 있기에 여러 차례와 보았지만 이번 행사는 각별하였기에 오늘 또 솔뫼에  왔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소나무 언덕을 뒤로하고 앞에는 교황 프란체스코 성하 께서 묵념을 하시는 동상이 있다. 교황께서는 200년 전에 태어난 동방의 작은 은둔국  조선의 사제에게 어떤 고뇌의 축복을 해 주셨을까? 

 자원봉사자 들의 철저한 방역으로 코로나19는 안심해도 되며,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내방객들은 좋은 순례가 될 것이며, 잘 다듬이진 잔디와 예수님의 고난 행적을 형상화 한 조형물 들은 아이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현장 이기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 바랬다. 

  

 

 안드레아(김대건신부의 세례명)는 1844년 부제서품을 받았으니 그의 나이 23살 때였다. 당시 천주교는 교세 확장보다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연락망 확보 그리고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항로 개척이었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어선에 넘겨 주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해 9 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행사장에서는 학술 토론회가 진행 중이었으며, 방송국 카메라가 열심히 촬영 중이었지만 나는 행사장을 나와 솔뫼의 소나무 사이를 걷고 싶어 그의 동상 쪽으로 갔다. 가을장마라는 예보가 있어서 인지 비가 부슬부슬 내려 나의 발길을 머뭇거리게 했다.  나는 가끔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을 들리면 정말 혼불과 같이 살다가 가셨구나 하고 생각이 잠기곤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더욱더 혼불과 같은 삶을 사신 젊은 사제 김대건 신부님이 곁에 계셨구나 하고 찬탄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수조의  가시연꽃이 빗방울에 젖고 물방울이 꽃잎에서 둥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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