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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문학

새 천년을 시작하는 영탑사에 새로운 전설의 옷을 입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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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영탑사에 들린 날은 영탑사가 불사 준비를 위해 한참 새 단장을 하고 있는 날이었다. 대웅전 요사채 유리광전의 문을 활짝 열어 재치고  법석과 불상에 대지 기운을  충진하고 있어  나는 어렵지 않게  범종, 금동비로자불나한상, 약사여래상을 친견할 수 있었다.

 

 

 다보탑은 단아했고 석가탑은 기상이 넘치는 천년 신라의 보물이며, 이들은 불국사의 대웅전 앞이 있다. 영탑사가 영험한 탑을 지니고 있는 사찰이라고 한다면, 영탑사의 주체인 7층 석탑이 촌스런 이름이 아닌 더 기품 있고 아름다운 이름의 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7층 석탑을 개명해서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사찰의 이름값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절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옷을 입히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기단도 없이 바위에 덩그란이 서 있고, 오르고 내리는 길도 찾아 헤매야 하는 7층 석탑은 조선 정조 22년(1798) 연암당 지윤 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하면서 그 뒤 바위에 세웠다” 는 기록이 사료 전부이다. 

 

 

개명을 한다는 이런 일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은 어색할 테지만 천 년 후 후손들에겐 값진 선물이 될 것 될 것이다.  

범종의 유래라면 “ 범종은 가야사에서 옮겨 저 왔다” 라는 기록 밖에는 어떤 사료도 없다. 가야사는 어디에 있는가? 가야사는 가야산 아래 덕산면 상가리에 있으며, 대원군이 풍수쟁이의 천하명당이며 임금을 하나도 아닌 2명을 배출할 자리란 말을 밑고, 멀쩡한 가야사를 불 지르고 남연군 묘를 연천에서 이장해 왔다고 한다. 사실 2명의 임금이 나왔고 천하명당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명당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야사에서 뜬금없이 범종이 영탑사로 왔다면 무슨 냄새가 날 법일 아닌가?. 대원군과 연관되지나 안았을까? 이야기 꾼들을 불러 모아 가야사와 남연군과 대원군과 영탑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내 이야기는 역사를 조작하거나  근거를 만들자는 애기가 아니라 동화 같은 전설은 만들어 후손들 에게 선물 하자는 이야기이다. 사찰은 중수 중창을 거듭해 왔다. 중수 중창하는 사찰은 건물만 복원하거나, 새로 짖고, 불상만 새로 모셔오기를 거듭했으며 관련된 이야기를 업그래드 하거나 업데이트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사찰은 양자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곳 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영탑사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위어가 함께 발전하는 것이 옮지 않을까?

"이상한 돌이 있어 무학대사가 아마타여래 석불은 만들였다"는 기록은 유리광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 상의 사료 전부이다. 무학대사가 망치와 정으로 직접 조각했을까?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아사달과 아사녀에 대한 역사적인 고증과 사료가 있느냐고 어느 누구도 묻거나 따지질 않는다.  에밀래종을 만들 때 쇠물에 빠져 죽은 이이에 대한 근거 할 수 있는 사료가 있느냐고 묻는 이도 없다. 그냥 전설로 받아들이고 같이  공감하고 있을뿐 이다.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에 대해서는 더 풍성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 같다. 삼존불은 크기가 품 안에 감출만큼 아담해서 흑심을 품은 자들의 표적이 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도난과 회수를 반복했으며 두 번째 도난은 불상이 갈가리 찢기는 수난까지 당했지만 지금은 영탑사에  모셔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수난을 당한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중생의 탐욕에 한탄하고 계실 것이 분명하며 사죄하는 의미로 이야기 꾼들은 이름다운 전설로 공양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두 차례 도난사건 이전인 고려시대에  누구가의 심미안과 섬세한 손놀림으로 불상은 만들어 졌을것 이다. 보통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은 크기가 엄청나서 도난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고려시대의 어느 장인은 왜 후손들이 도난에 전전긍긍하도록 작게 만들었을까?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과 함께 금강역사도 만들였다면 절도범의 범접을 막을 수 있겠다고 상상도 해 보았다.

 

 

영탑사가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주문도 없고 금강역사와 나찰이 감시하지도 않아 맘 편이 불공도 드릴수 있어서 이었던 것 같다. 거목인 아름다운 나무가 일주문을 대신하여 내방객들을 맞이 한다. 대중 친화적이며 문턱 없는 사찰이 영탑사의 트레이드 마크 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영탑사가 풀을 깎고 다듬어야 할 영역은 엄청나게 넓어 입구의 쑥 재배포지부터 시작하여 스님들이 울력하시는 채마밭, 대웅전 뒤편의 절개지, 요사채 주변과  유리광전 주변 그리고 7층석답등  5,000평은 넘을 것 같다. 가보면 항상 스님의 머리단장하듯이 깔끔히 정돈된 모습을 보면서 스님들의 노고에 늘 감사드린다. 

재차 말씀드리는 것은사를 조작하고, 없는 근거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며, 어느 누구와도 이해 충돌 없는 에밀레종과 같은 잔잔하고 정감이 가는 동화 같은 이야기(전설)를 만들어 영탑사를 풍성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이야기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영탑사 가는 길에 두견주 전수관이 있다. 전에는 남문 밖 경량철골 조립식 건물에서 두견주를 빗었었다. 두견주 전수관은 면천두견주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는데 성하리 영탑사 가는 갈목에 세워졌다.. 영탑사 방문 시에 한번 들려 보는 것도 좋을 듯 십다. 

내  여기서 말하는 야야기꾼은 블로거 들을 말 한다. 영탑사에 얽힌 전설을 신춘문예 작품 공모하듯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니 뜻있는 블로거들이 시청 문화관광홈페이지나 면천중학교 등의 홈페이지에서 멋진 영탑사 전설에 대한 난상 토론으로 7층 석탑에 대한 전설, 범종에 대한 전설, 약사여래상에 대한 전설,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에 대한 전설이 생성면 50년 후, 100년후 후손들은 고찰의 향기를 유의미하게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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