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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서 원폭의 성자 " 나가이 타카시" 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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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농업기술원의 글로벌 인재 대학생 신분으로 나가사키에 가기 전까지 내가 알았던 나가사키는

나가사키 짬뽕, 나비부인, 그리고 제일 먼저 개항이 전부였다.

 

전날 구마모토항을 출발해 아리아케 해를 건너 운젠 지옥을 거처 이곳 나가사키까지 온 경로를 천천히 생각하며, 느긋한 눈으로 베란다의 햇살과 함께 바라보이는 경관은 부산 앞바다와 같이 잔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쪽빛 항구였다.

 

천천히 게으름을 피우며 창밖을 보곤

 

~ 이곳이 일본서 처음 처음 개항한 곳이라고?”

"사세보는 저쪽 이겠군"

 

 

그렇고 보니 큰 상선이 서서히 항구로 접안하고 있었고, 작은 배들이 물방개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내가 보고 싶은 곳은 원자탄 피폭의 참상을 그린 평화공원이었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절대무기 원자탄의 가공함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무에서 유를 다시 만들

나가사키의 정신을 알고 싶어서였다.

 

알고보니 나가사키가 유에서 무를 창조한 밑바탕에는

"나가이 타카시 정신" 이 바탕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나는 이때까지 의사 "나가이 타카시"에 대해서 전혀 몰랐었다. 

다음은 나가이의 행적을 기술한 의학신문의 내용이다.

 

 

성탄절 날 저녁 하숙집 주인 딸 하루노가 맹장염에 걸리자 그가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을 한다.

건실한 그녀의 내조는 타카시가 의학자로서 성공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으며, 1933년 군의관으로 만주사변에 참전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하다가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게 된다.

전쟁 후 대학에 조교수로 돌아와 방사선과의 진흥과 독립에 몰두하였다.

특히 연구에 열중하여 임상 의학계를 선도하나 방사선 피폭을 많이 받게 된다.

우연히 급성 인후염을 항체로 치료하다가 부작용이 생겨 고생을 하고, 체질이 변해 천식발작이 시작되었으며, 그 후 그는 더한층 종교적으로 변하여 육신의 허무함을 실감하고 세상사와 멀어진다.

1941년 일본 군부가 영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그는 공습으로 인한 부상자를 뢴트겐으로 적절하게 치료하기에 분주하면서도 대학교수의 본분에 매진한다.

 

기자재가 부족하여 필름 없이 투시를 하면서 방사선에 수없이 노출되었고, 마침내 만성 골수성 백혈병이 발생한다.

3년 정도 생이 남았다는 통보를 받자 그는 잠시 당황했으나 그 기간이면 자신의 일을 끝내기에 충분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10년이라면 도중에 마음이 해이해질 수 있지만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일을 계속하기에는 3년은 꼭 알맞은 시간이다.”

운명의 날인 1945년 8월 9일이 되었다.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시에 떨어진 것이다.

오전 11시 그가 연구실에서 문득 창 밖을 보니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지붕들이 자줏빛으로 늘어서 있고 그 위에 눈이 부실만큼 푸른 나무로 가득한 이나 사 산이 보였다. 창 밖 오동나무에는 매미가 한창 울고 있었다.

 

웬일인지 잠시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번쩍 시퍼런 섬광이 가로지르고 세상은 온통 폭풍과 먼지로 깜깜해졌다.

의식을 회복하고 간신히 다친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다보니 지구가 벌거숭이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제 자리에 없었다.

살아남은 의료진 몇 명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있을 때 그는 분신 같은 연구 자료들이 잿더미로 변한 것을 발견한다.

3년 동안 버티려고 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더 큰 비극은 가족에게 있었다. 대학에서 1 km 떨어진 집이 없어지고 부인 하루노는 한 줌의 뼈로 남아있었다.

 

3년 후 남편의 유골을 안고 가기로 되어있던 부인이 먼저 새카만 재로 변한 것이다. 두 어린것도 같은 길을 갔다.

전쟁에 대한 인류의 운명을 생각하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 땅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45년 10월 나가이 교수는 피폭 당시의 사건들을 기록한 `구호대 활동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만 두라, 멈춰라.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장난을 하는 것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진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나가사키 최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또, 피신하여 살아남은 두 남매와 함께 피폭지에 거주하면서 잔류 방사성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학문적으로 관찰하였다. 이런 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재개발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그는 남은 생을 오두막 "여기다"에서 지내며 구호와 진료에 몰두하였다. 한편, 문필가로 17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집필하여 시련으로 더 강해진 인본주의 신념과 신앙을 전파하였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진실과 사랑, 희망을 평이한 어투로 표현한 책들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원고료는 모두 이웃에게 기부하였다.

나가이 교수는 피폭 후유증과 백혈병으로 1951년 43살의 나이에 타계했다.

일본 정부는 국가표창과 나가사키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장례는 폐허가 된 우라카미 교회 광장에서 2만 명이 모여 이 참 영웅을 회상하는 가운데 엄숙하게 치러졌다. 영결식이 끝난 후 모든 교회와 성당, 사찰이 일제히 종을 울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서에서 “전쟁을 안 하겠다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 달라.”라고 당부했다. 지금도 그의 기념관에 연 15만 명이 참배하고 있다. 나가사키 박사는 일본인의 마음속에 `나가사키의 성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의사신문(http://www.doctorstimes.com)

 

 


우리는 지금 물질적으로는 풍요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없이 피폐해지고 있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없고, 봉사하고 헌신하려는 희생정신도 없다.

"봉사와 희생정신이 이 시대에 왜 중요하냐고?"
"쉽게 돈 벌어야 하고, 목적을 위해 정의로운 따위는  필요 없다고? "

나가이 타카시 정신은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것 이다. 세상이 바뀌어 시간을 돌릴수 없는 사조라면 단연코 말 하겠다.

못 하는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것 이라고

이 세상에 왔다가 버러지처럼 살다가 가지 말기를 모든 이들 에게 말하고 싶다.
맹자의 말씀 "不爲也 非不能也"를 다시 한번 음미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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