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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문화의 향기/가야산 구석구석

불한당 오패르트가 우리동네 앞 바다에서 활개를 첫 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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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담도는 서해대교가 놓여지기 전 까지만 하여도 조그만 분교 장에 주민 50여명이 살던 조그만 섬마을 이었다.

거룻배를 타고 신평면 매산리로 나와 생필품을 구입했던 가난한 주민들로 육지 인들이 천엽 이라도 가면 이를 치성 해주고 푼돈을 받아 수입을 올렸으니 이들이 소원은 이 지긋지긋한 섬 생활을 훌훌 털고 뭍으로 나와 사는 것 이었단다.

그런데 서해대교가 놓여지고 휴게소가 들어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벌어 진 것 이다.

 

 

 

 더 놀라운 일은 정보화의 물결로 무지에서 깨어난 주민들이 백 몇 십 년 전에 우리동네 앞바다인 행담도에 독일의 도독놈 오페르트가 배를 정박 해 놓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구만리에서 상륙하여 러시아 병정 이라고 속이고 덕산 관아에서 현감을 겁박 하고 가야산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묘를 도굴 했으며, 이에 우리 관원들은 대처 하지 못하고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맥을 못 추었다니 기가 막힌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오페르트는 끝내 기도했던 목적을 이루지 못 했지만 방자한 그의 행적은

무덤 속의 시신을 파 헤쳐 시신을 가지고 대원군과 통상을 요구하는 흥정을 하려고 했다니 기가 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주교를 탄압 한다고 하여 이에 대한 반발로 오페르트의 압잡이가 되어준 천주교 신도들도 지탄받아 마땅 하지만, 총으로 무장한 오페르트 일당에 무력 하다 못해 국가의 존립마저 의심 캐 하는 관원 또한 분통이 터진다.

 

 

 

지금은 삽교천 뱃길이 담수호에 모래만 쌓여 흔적만 남이 있고

남연군묘소에는 천하명당 이라고 하여 풍수를 배우려는 사람들만 간간이 올뿐 국기를 뒤흔들던 혼돈의 현장은 찿아볼수가 없었다. 벽여년전 이런 일이 우리의 문 앞에서 일어 났던 것을 우리는 왜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일까?

 

국가란 무엇인가?

현대의 더 혼돈스러운 격랑이 조선시대의 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게 하는 것 인가?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이를 거를 삼아 부끄러운 일을 다시는 안겠다고 다짐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현장에서 윤봉길의사의 애국애족을 배우고,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에서 독립정신을 배운다.

자랑스런 역사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도 이를 숨기려고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밝혀서 이를 알고, 다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를 삼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 에서는 남연군 묘소 옆에 오페르르의 만행과 행적 그리고 국가가 대응했던 모습을 적시 하는 자료실을 만들어 방문객들이 볼 수 있게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 된다.

국가의 존립 이유와, 부끄러운 역사를 두 번 다시 안겠다는 다짐을 후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국가가 해 야할 일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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