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신리성지

신리성지의 추억 문짝이 와장창 부서지고, 관졸들이 육모 방망이를 휘두르며 봉두난발한 사내를 댓돌 위에 내 동댕강이 치니, 머리 얼굴에서 선혈이 낭자한 사내는 마당에 폭 고끄러 지며, 관졸은 사내를 무참히 때리고 또 때리더니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갔다. 이 집은 손자선(세례명 토마스)의 집이었으며, 기거하던 다불뤼 주교를 찾던 관졸들은 광분하여 보이는 사람이며 마구 체포하였다. 다불뤼 주교는 거더리 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니 이곳이 신리 공소였다. 이렇게 무섭고 험악했던 장소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스럽게 놀고 있었다. 내가 처음 신리에 간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신촌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을 따라 신리공소의 옆 단칸방에서 생활을 했을때 였었다. 짚누리가 산처럼 높았었고, 싸락눈이 내릴 때까지 벼를 타작 했던 것을 .. 더보기
합덕을 부흥시킬 마지막 자존심 합덕성당 어릴적 합덕성당에 대한 기억은 천주교 신자인 친구를 따라 합덕 성당엘 갔다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외국인 신부를 본후 공포에 질려 성당 근처를 얼씬도 않 했던 일이 있었다. 작달막하고 약간 뚱보안 서양 신부 는 눈이 파랗고 수염은 양 옆으로 꼬아 올렸으며 그때 본 사제복은 피에로 같았던 것 같다. 촌부만 보아왔던 어린 나는 무서움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 아마 조선 말기에 서양인을 양이라고 하며 도깨비 처럼 신기하게 보였던 민중의 시각 그대로였던 것 같았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신촌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시던 부친께서는 눈오는 어느날 내 손을 잡고 20리도 넘는 합덕장엘 가서 중국집의 찐빵을 사 주셨다. 중국말을 하는 중국집 주인도 신기했지만 오가면서 본 거대한 산같이 크게만 보였던 ..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