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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건강은 내가 지킨다./액티브 시니어

양자역학 을 땅꼬마로 보는 농부의 관찰자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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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큰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농사를 지어 왔다.

 

부지런한 농부는 새벽에 살포를 쥔 손을 뒷짐 지고 논두렁의 물꼬를 보며, 아낙은 새벽이슬을 헤치고 풋고추를 따서 아참상을 성찬으로 만든다.

이때 문외한은 알 수 없는, 농부는 벼 포기와 아낙은 고추 포기와 무언의 교감을 한다.

 

 

이때 농작물은 기운을 차리고 쑥쑥 큰다.

나는 이런 현상을 관찰자의 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다. 관측되기 전에는 빛은 입자이기도 하면서 파동이기도 한 상태이다가

관측을 하는 순간 파동 혹은 입자의 형태를 띤다. 관측 이전에는 불확정 상태이나 관찰자의 관측이 있는 순간 특정상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단호박꽃은 아침에 활짝 피고 부지런한 꿀벌들은 바삐 움직인다. 관찰자인 농부의 발걸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슬을 먹은 꽃잎은 정기를 발산하는 것처럼 반짝 인다.

이때 농부의 게으름으로 기척이 끈기면 금세 꽃 잎은 희끄므래 해 지고 시들 해 진다.

 

농사를 오래 한 늙은 농부들은 이를 알아차리고 새벽같이 논과 밭으로 달려간다,

그러고 보니 작물과 무언의 소통을 하는 촌부의 두뇌 속 컴퓨터는 양자컴퓨터 보다 한수 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양자 도약을 알기 전까지 나는 숫자를 천재들의 매직 쇼라고 생각했었다.

 

학창 시절엔 수학을 저주했고, 타고난 음치였기에 음악은 젬병이었으며, 몸이 왜소하고 약골이라서 체육을 기피했으니 도저히 호감이 가는 타입은 아니었었다. 

 

그런 내가 눈여겨보았던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는 동네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동네 사장님 있었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미남형이었으며 힘도 좋은 이 사내는 좌중을 휘어잡고, 여자에게 인기도 많아 돈을 물쓰듯 썼으니

그 당시 방앗간 사장인 그는 지역의 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무소불휘의 힘을 가진 인기 짱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일자무식이었는데도 장부 없이 돈거래를 척척 해 대는 것을 보고 놀라웠으며, 그를

본 후 숫자에 대한 지력은  타고나야 된다고 믿어 왔고, 그를 보곤 나는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해 왔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일상 접하는 재무제표나 손익계산서를 회계사에게 맞기는 것을 보면 숫자에 대한 공포가 평생을 짓 누른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 아인슈타인 아나 정교하게 우주선을 달에 안착시키는 NASA의 물리학자들을 나와는 다른 별종의 인종 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슈레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 결국은 물리학과 인문학은 영원하 만날 수 없었을 것 같았는데 만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입자와 파동의 도약은 분명히 생명의 비밀을 열 것 같아 기대해 본다.

 

동양의 생사관을 저급하게 생각해 왔던 종교계에서는 어떤 변화가 올지 궁금해진다.

물리학자들이 생명의 비밀을 밝히면 세상은 또 한 번 바뀔 것이다.

 

" 그래 옷을 갈이 입는 거야.

다육식물이 묵은 잎을 벗어던지고 새 잎이  나오듯이

우리도  육신이라는  거추장한 옷을 벗어 버리는 거야

양지 도약하는 거지 뭐~"

 

" 옷을 벗으면 나는 어디로 가지? "

 

동양의 생사관을 다시 한번 알아보았다


동양사상의 근본은
첫째인간은 어디까지나 우주 대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적 생성과정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둘째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마음과 몸의 두 가지 요소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기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비교적 정리되어 이론적 틀을 갖춘 것은 노자장자의  도가사상이다.

장자(莊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사람의 삶은 기가 모인 것에 불과하다. 기가 모이면 삶이요, 흩어지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기의 모임과 흩어짐일 뿐 따로 어떤 주재자에 의해 예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생과 사는 천지 등 관통하는 일기의 변화과정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일체이며 동상이다. 삶과 죽음은 한시도 고정되지 않는 자연의 유동과 변화, 순환작용의 일부에 불과하다.

삶과 죽음을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생각하는 견해에는  도가 계통의 인물인 회남자(淮南子)에 의해 설명은 계속된다...

 

그에 따르면

“세상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원초적 존재인 기가 혼돈상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맑고 가벼운 [淸輕] 기와, 무겁고 탁한 [重獨촉]기로 나누어진다. 앞의 기는 떠올라 하늘이 되고, 뒤의 기는 가라앉아 땅이 된다.  천지는 상호작용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며, 이때 부여받은 기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나타난다. 이 중 인간은 천지의 가장 뛰어난 기[秀氣]를 받아 생성된다. 이 경우 하늘의 기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장자의 지략 편(至樂篇)에서는 먼저 생사
가 자연적 변화과정의 범주에 따르는 현상임을 밝힌다.

“혼돈한 가운데 변화가 이루어져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겨나며, 형체가 변하여 삶이 나타난다. 삶이 또 변하여 죽음이 오니 이는 천지의 춘하추동 사시 변화와 서로 짝하는 것이다.”



점점 머리가 복잡해진다.

 

양지 도약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가 은하철도 999의 승객이 될 것 같다.

숫자가 아닌 확률로 설명되는 양자 도약은 기()의 이합 집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으며, 무한정 복제되는 기계인간은 항상을 순간 이동할 것이니 하느님이 따로 없이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니 두렵다.

 

은하철도 999는 어린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으로 알았는데

인간 내면의 배신과 증오 잔학함과 냉소가 점철되어 있으니 이걸 보고 큰 아이들이 어떤 모습일지 끔찍 해 진다.

 

 

아직도 이슬을 머금고 있는 단호박 꽃 보며 생명의 근원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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