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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문학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시민의 사랑받는 장소로 만들수 있다. 나는 오늘은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글을 쓴다. 지금까지는 언감생심 기대할수 없었기에 메아리 없는 허공에 대한 독백 이었으며, 적지 않은 나이에 무언가 주변을 정리해 나가겠다는 마음으로 잡문을 부끄러움 없이 포스팅했다. 그런데 나의 잡문을 읽어 준다는 친구가 있으니 힘이 생기고 내가 얼마나 글을 양산 할지 모르지만 힘 닿는데 까지 노력 해 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혹시 누가 아나? 작가라도 돼서 인세라도 받고 그 돈으로 친구들과 회포를 나눌 수 있을런지? 오늘은 아내가 치과엘 간다고 하기에 픽업하고 돌아오는길에 기지시 줄다리기박믈관엘 들렸다. 비가 구질구질 오는데 몇사람이 갑갑해서 인지 박물관 운동장을 배회 하고 있는것이 눈에 띄었고, 그 넓디넓은 공간이 한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그러.. 더보기
행담도휴개소의 뒤에는 가슴아픈 흑역사가 있었다. 행담도앞 모래톱은 물이 빠지면 바지락이 지천 이어서 은밀히 포구에 배를 댄 선장은 돈을 받고 사람을 넘치도록 실고 모래톱 근처로 가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모래톱이 보이면 사람들은 날쎄게 뛰어내려 바자락을 캐기 시작 한다. 오직 호미끝만 보고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흠칠새도 없이 캐다보면 손이 빠른 사람은 제힘으로 추슬릴수 없을 정도로 캔다. 물이 들어오면 선장은 빨리 배에 오르리고 소리처도 발목이 잠길때까지 캐다 조수에 떠 밀려 죽는 사람도 있고, 여우꼬리 같이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배가 뒤집혀 때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곳이 행담도 근처에서 일어난 오래지 않은 이야기 이다. 행담도는 충남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밀물 때는 물이 차지만 물이 빠지면 갯뻘을 건너 다녔으며, 일명 토끼섬.. 더보기
합덕을 부흥시킬 마지막 자존심 합덕성당 어릴적 합덕성당에 대한 기억은 천주교 신자인 친구를 따라 합덕 성당엘 갔다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는 외국인 신부를 본후 공포에 질려 성당 근처를 얼씬도 않 했던 일이 있었다. 작달막하고 약간 뚱보안 서양 신부 는 눈이 파랗고 수염은 양 옆으로 꼬아 올렸으며 그때 본 사제복은 피에로 같았던 것 같다. 촌부만 보아왔던 어린 나는 무서움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으니 아마 조선 말기에 서양인을 양이라고 하며 도깨비 처럼 신기하게 보였던 민중의 시각 그대로였던 것 같았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신촌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중이시던 부친께서는 눈오는 어느날 내 손을 잡고 20리도 넘는 합덕장엘 가서 중국집의 찐빵을 사 주셨다. 중국말을 하는 중국집 주인도 신기했지만 오가면서 본 거대한 산같이 크게만 보였던 .. 더보기
혼불처럼 살다가 홀연히 하느님 곁에 가신 사제 김대건 새남터의 모래가 막난이의 칼춤으로 피물을 들일 때 25세의 젊은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을 믿은 것도 죄냐" 고 외척을 것이다. 머리는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매달리고 시신이 미리내에 묻힐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했노라고" 고백하였을 것이다. 오늘은 혼불처럼 살다가 홀연히 하느님 곁에 가신 사제 김대건 신부를 만나러 솔뫼성지에 갔다, 솔뫼성지는 소들 강문 끝자락의 구릉지에 위치해 있다. 소들 강문은 강문리의 넓디넓은 논에 모내기철 써레질하는 소들이 끝었이 어이 진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으며, 김대건 신부의 조상들도 소들 강문 어딘가 에서 논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가 조선에서 태동하는 시기인 1821년에 솔뫼에서 출생하였으니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사옥(1832년) 사이의 동장군보다 더 엄혹..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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